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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원택
작성일
2004-06-27
제목
손녀를 부끄러워하신 할아버지
손녀를 부끄러워하신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를 처음 뵌 것은 제가 대학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학교내 종교 동아리 총무를 맡았던 저는 학우들과 함께 나환자촌을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나환자촌에는 나이 어린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이셨습니다.
우리 학교의 학생처장 교수님은 그곳이 나환자촌이라는 이유를 들어 우리들의 활동에 우려를 표했지만, {나병은 일상적인 활동으로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학상식을 들어 해명하고, 간단한 일손 돕기, 청소, 홍보물 발송작업, 말벗 되어주기 등의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나환자마을의 대표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자연히 저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특히 경로잔치를 해드리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그분과 자주 의논을 해야했기 때문에 더욱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경로잔치를 위해서는 우리 종교 동아리뿐만이 아니라 학교의 민속극회가 필요할 것 같아 그들을
데리고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탈춤과 사물놀이를 하는 민속극회야말로 경로잔치에는 제격이었던 것입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대표 할아버지가 있는 방을 민속극회 학우들과 함께 찾아가 어른들에게 대한 첫인사로 그 방에 있던 모든 할아버지들게 무릎 꿇고 큰 절을 올리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들께서는 예절을 아는 듯한 젊은 대학생들로 인해 무척 기뻐하셨습니다.그리고 바로 다음날 경로잔치 행사준비로 다시 마을에 찾아갔었는데, 그만 어제의 그 방에 있던 할아버지들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중태에 빠지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엄청난 흉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큰절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저희야 꿈인들 알았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큰절을 드린 저희가 그나마 이생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이니…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렇게 나눈 정이 하늘나라에서나마 조금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명복을 빌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나신 분들 중에는 마을 대표이신 그 할아버지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회복되는 동안 주위사람들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사회에서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계셨고, 어엿한 자식들도 있으며, 예쁜 손주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나병은 나았지만 그 흔적 때문에 자손들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자진해서 나환자촌에 들어와 산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찾아와 함께 가서 살자고 종용하지만, {내 손주딸 혼사 길 막을 일 있느냐}며 아예 찾아오지도 말라고 쫓아내듯이 거절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쁜 손녀를 품안에 안아보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마는 혹시라도 그 손녀의 장래의 해가 될까봐 그렇게 자신을 숨기는 그분의 서러움이 마음 깊숙이 저려 왔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는 품세나 언어사용의 절제로 보아서도 보통분이 아닌 듯 싶었으나 감히 자세한 내막을 묻고 그분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장애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사회에 격리되어 살아가는 그분의 아픔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낸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죄송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장애로 인해서 예쁜 손주딸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는 그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악수를 청해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던 그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분의 아픈 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후 그분은 회복되셨고 저와는 종교적으로 특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잘 해드리지도 못했지만 그분은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있을 때도, 적은 봉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오희려 저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일이 있은 후 수십 년이 지나, 이제는 그분마저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그 분이 이 세상에 사실 때 품었을 서러움과 아쉬움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은 하루빨리 없어졌으면 합니다.
사랑스럽고 예쁜 그대의 연인이 바로 그 할아버지의 손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당신의 사랑이 식는다면 당신은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애달픈 사랑에 비하면 그런 사치스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컬럼니스트/행정컨설턴트 임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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