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식아동 지원단체 '함께 사는 사람들' 풍경
"설날 세배하면 오천원" "와~와~"
날마다 끼니 챙겨주고 공부도 함께
친자식들도 헌옷 입고 中古 책가방
신지은기자 ifyouare@chosun.com/ 입력 : 2005.02.06
“설날에 세배하러 올 사람?” ‘왕아빠’ 임은동(50)씨 한마디에 손이 번쩍 번쩍 올라갔다. “저요! 저요!” “저도 올래요.” 아이들 15명이 설날을 ‘왕아빠’와 보내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번 설에 세배하는 사람들에게 5000원씩 주겠다”고 하자, 아이들 입이 귀 밑까지 벌어졌다.
설을 나흘 앞둔 5일 낮 12시 서울 강동구 길2동 낡은 3층짜리 건물. 결식아동지원 단체인 ‘함께 사는 사람들’ 35평 공간에 똘망똘망한 아이들 15명이 들이닥쳤다.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편부모 밑에서 자라는 결식아동들이 상당수다. “선생님 오늘 반찬은 뭐예요?” “간식은 뭐 주실 거예요?” “물 떠다 놓을까요?”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 결식아동들을 위한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만든 임은동, 임혜경씨 부부. 이들은 아이들에게‘왕아빠’ ‘왕엄마’로 불린다.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사무실 구석에 마련된 부엌에서는 밥 끓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압력 밥솥 뚜껑은 김을 뿜으며 돌아가고, 양념을 가득 묻힌 생선이 프라이팬에서 자작자작 타고 있다. 아이들이 ‘왕엄마’라고 부르는 ‘왕아빠’ 부인 임혜경(여·44)씨가 양손에 밥그릇을 들고 식탁과 부엌 사이를 왕복했다. 사회복지사 2명도 미역국을 퍼나르고, 수저를 챙겼다. 이런 풍경은 설날도 예외없이 365일 계속된다.
임씨 부부는 설날인 8일 결식아동들과 함께 국악원에서 열리는 민속극을 본 후, 서울 잠실주경기장의 눈썰매장에 가기로 했다. 4~5명의 자원봉사자도 동참한다. 손성이(여·51·운영위원장)씨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있거나 이모·고모 집에 얹혀 사는 아이들은 명절만 되면 이곳으로 몰려와 떡국을 함께 먹는다”며 “올해는 20여명이 올 것 같다”고 했다.
설날을 ‘설날답게’ 보낼 수 없는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이다. 요구르트 배달일을 하는 할아버지(73)와 살고 있는 한철수(가명·13·중학교1)군은 “집에 혼자 있으면 슬픈데, 여기 오면 항상 웃어서 좋아요. 설날에도 여기서 떡국 먹을 거예요”라고 했다. 철수는 광진구 자양동 집에서 40분 동안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이곳을 찾는다. 강민우(가명·8·초등학교 2)군도 “선생님들이랑 수학 공부도 하고, 다 같이 밥 먹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경기도 안양, 서울 강북구 쌍문동에 사는 아이들도 설날에 이곳을 찾기로 했다.
▲ 결식 아동들이 한 끼의 따뜻한 점심 밥상을 앞에 두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들의 기도는 설날 연휴에도 이어진다. 5일 서울 강동구 길2동 ‘함께 사는 사람들’에서.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설날 나들이에는 임씨의 큰아들(14)과 작은 아들(12)도 동행한다. 가족의 설날과 결식아동의 설날이 따로 없는 것이다. 평소에도 마찬가지다. 임씨의 자녀들은 결식아동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선생님’, 또는 아이들이 부르는 방식 그대로 ‘왕아빠’ ‘왕엄마’라고 불렀다. 지원받은 헌옷을 입고 중고 책가방을 메는 것도 결식아동들과 똑같다.
임씨 부부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만든 것은 2000년. 가족들이 살고 있던 방에 결식 아동들을 불러 모았다. 자원봉사자 20여명도 함께했다. 주부, 전기공, 컴퓨터 프로그래머, 우체부 등. 이들이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5000원, 1만원이 아이들의 등을 떠받쳐주고 있다. 부엌에 쌓여 있는 파, 두부와 사무실의 책꽂이 등도 개미 후원자들이 보내준 정성이다.
돈봉투’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교육봉사 희망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무실에 걸린 칠판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봉사자들의 공부방 시간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들이 행사가 있는 설날 당일을 제외한 연휴 기간에도 공부방은 운영된다. ‘왕아빠’ 임씨는 “부모가 가출하거나, 가정 폭력에 시달리면서 가슴에 상처를 품고 오는 결식 아동들이 언제나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설날, 24시간 문을 열고 반기고 있다”며 웃었다.
사회복지학계가 추정하는 결식아동은 전국적으로 20여만명. 명절일수록 배고프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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