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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한울타리
작성일
2009-08-14
제목
의료ㆍ보건 나환자촌 한센인과 더불어 '인생 2막' 사는 81세 의사
의료ㆍ보건 나환자촌 한센인과 더불어 '인생 2막' 사는 81세 의사
전북 익산 김신기씨, 보슬비 내리는 11일 오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온수리 삼산의원. 지은 지 28년 된 단출한 2층 벽돌건물이다. 건물 밖 돼지 농장에서 구수한 거름 냄새가, 의원 안에선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피부과·외과 진료를 하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 김신기(81) 박사가 사무장 1명, 간호사 3명과 함께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한다.
삼산의원은 한센인 정착마을인 익산농장에 있다. 왕궁면에는 금오농장·신촌농장 등 한센인 정착마을이 두 곳 더 있다. 세 마을에 사는 한센인은 모두 1514명이다. 소록도 다음으로 규모가 큰 한센인 정착마을이다.
김 박사는 익산 도심에서 부인 손신실(75·산부인과 의사)씨와 함께 병원을 운영하다가 23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당시 이곳의 병원 이름은 '한일기독병원'이었다.
▲ 전북 익산 온수리에 있는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삼산의원을 운영하는 김신기(81)박사가 주민들이 가져온 나물들을 내어보이고 있다./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부부는 23년간 한센인과 함께 늙었다. 남편과 함께 환자를 돌보던 부인 손씨는 2년 전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진료를 그만뒀다.
김 박사는 "독립유공자 아버지의 영향인지,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돈만 벌다 가지는 말자'는 생각을 자주 했다"며 "결혼할 때 마누라랑 '환갑 넘으면 어디선가 봉사를 하며 살자'고 약속했다"고 했다.
김 박사는 1953년 여수의 한센인시설 '애향원'에서 1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그는 "그때 추억 때문에 인생 2막을 한센인과 함께하게 됐다"고 했다.
"원래 내가 수다쟁이여. 겁도 없어. '옮으면 옮는갑다'하고 갔는데, 이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 한센인들은 세상 때가 묻지 않아 참 순하고 또 슬픈 사람들이거든."
김 박사가 손씨에게 "아이들도 다 컸으니 지금 병원을 정리하고 한센인 마을에 들어가자"고 했다. 부인 손씨는 "선뜻 '그러자'는 소리가 안 나왔다"고 했다.
"두 아들이 자라면서 한 말을 떠올리고 내 마음이 움직였어요. 아들들이 '부모님처럼 진료실에 갇혀서 일만 하고 살지 않겠다'는 소리를 자주 했거든요. '벌이는 적어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남편 뜻에 따랐지요."
부부는 익산 시내의 2층 양옥집을 팔고 익산농장 근처에 아파트를 얻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한편 크고 작은 봉사를 했다. 봉사단체에서 돈을 끌어와 한센인들을 위한 공동목욕탕을 지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준 포상금으로 마을회관에 심야 전기보일러를 달아줬다. 마을 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잡았다.
손씨는 "처음에 마을회관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할 때는 환자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목욕탕에서 등 밀어주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이날 오후 3시10분쯤 한센인 권귀임(85)씨가 딸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들어섰다.
"팔뚝이 애려서(쑤셔서) 왔어요. 허리도 겁나게 아픈디, 선상님이 주사를 놔주면 싱겁게 나서(나아) 버려요."
김 박사가 "너무 싱겁게 나서면 재미없는디" 했다. 그는 이날 환자 50명을 봤다. 한센인도 있고, 목포·여수·광주 등지에서 찾아온 오래된 단골들도 있었다. 병원 사무장 박흥규(58)씨는 "요즘은 한센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서 낮에는 외지 환자들이 더 많다"고 했다.
김 박사는 지난해 협심증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고 7개월간 병원 문을 닫았다가 지난 2월 다시 열었다. 한센인 권씨가 "박사님이 쓰러졌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 터졌다'고 걱정했다"고 말했다.
"환자들 먹고 힘내라고 돼지 잡아 주고, 치료도 친절하게 해주는 분인데. 선상님 안 계시면 우리는 어디로 가라고. 선상님, 건강하시요 잉."
이날 김 박사는 마을 사람이 가져다준 고구마 줄기를 들고 퇴근했다. 그는 무릎이 아픈 부인을 대신해 청소와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익산=한경진 기자 kjhan@chosun.com 입력 :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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