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일 (월) 10:18 오마이뉴스
엄마 아빠 귀엔 골든벨이 울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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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혜원 기자]
▲ 2일 방송된 <도전! 골든벨>(관동지역 연합편)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한민지양(강릉여고 3학년). 골든벨을 울리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엄마를 저렇게 닮았을까?'
지난 2일 방송된 <도전 골든벨>(관동지역 연합편, KBS 1TV). 마지막 50번째 문제에 도전한 한민지(강릉여고 3학년)양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털털하고 당당해 보이는 민지의 웃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침착한 모습이 엄마 엄성연씨를 떠올리게 했다.
"민지 엄마아빠는 장애인입니다. 우리 민지는 대단한 손녀딸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부모를 위해 통역도 했던 딸입니다."
손녀딸을 응원하기 위해 녹화 현장에 오셨던 외할머니의 이 말에 민지는 "장애를 가진 부모님 때문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장애인이나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응답했다.
비록 민지는 마지막 50번째 문제를 놓쳐 골든벨을 울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지의 부모님의 마음속에는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충만한 종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골든벨 도전한 한민지양, 부모님은 농아인
얼마 전 알고 지내던 사회 복지사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학생이 고등학생 퀴즈 프로그램인 <골든벨>에 출연했다고, 아깝게 50번째 문제를 놓치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고 했다(4월 2일 방송된 관동지역 연합편은 2월에 녹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의 부모님 두 분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인(농인)이라고 했다.
"50번 문제의 답이 '황금가지'였는데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참 안타까웠고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 정도도 잘 한 거라 생각하고요. 그 자리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부모님이 오셨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부모님은 더 중요한 일을 하시니까요. 방송 때 보시면 되지요, 뭐."
사회 복지사 선생님에게서 얻은 전화번호를 구해 한민지양과 통화할 수 있었다. 아깝게 50번째 문제를 놓쳤지만 민지는 실망하지 않았다. 전화 통화에서도 똑 부러지고 야무진데다 명랑 쾌활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농아인 우리 부모님, 중요한 일을 하시죠
▲ 농아인협회 강릉시지부 엄성연 지부장(왼쪽)과 그의 남편 한휘 이사장.
ⓒ2006 김혜원
그리고 지난 3월 23일, 강릉시 포남동의 한 가건물 2층에서 민지의 부모님을 만났다(민지양은 학교 수업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 '강원도농아인협회 강릉시지부' 엄성연(44) 소장과 한휘(49) 이사장. 특별한 장식도 없이 허름한 소파와 책상 몇 개가 전부인 곳에서 두 분은 7년째 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자가 내민 손을 잡은 민지 엄마 엄성연 소장은 웃으면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표현한다. 엄성연씨는 선천적인 장애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농아인이다. 이미 7년째 장애로 소외되고 답답한 사정이 있는 농아인들을 위해 농아인협회 강릉시지부 일을 해오고 있어 지역 농아인들에게는 '천사'로 통한다.
"농아인들의 경우 문맹이 많아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듣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글을 배우는 것과 우리 같은 농아인들이 글을 배우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요. 우리에겐 한글도 외국어처럼 따로 외우고 익혀야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거든요."
수화통역을 맡은 김현철(30) 사회복지사에 따르면 농아인들은 수화와 글을 동시에 배워야 하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의 언어 습득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한글뿐만 아니라 수화 역시 교육기관에서 배우지 않으면 익힐 수가 없어 그런 시설이 부족한 지방에 사는 40, 50대 농아인들은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엄성연 소장과 한휘 이사장은 이렇게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는 문맹 농아인들을 돕는 일을 하는 '농통역사'다.
못 듣고 말 못한다고 농아인 괄시 말아요
▲ 문맹 농아인들의 의사 소통은 이렇게 그림으로 이뤄진다.
ⓒ2006 김혜원
농통역사는 문맹 농아인의 손짓 발짓을 수화로 통역한다. 수화통역사가 비장애인이 수화를 배워 말로 통역하는 거라면 농통역사는 농아인이 생활 속에서 배운 자신들의 언어를 수화로 통역해 수화통역사에게 전달한다. 문맹 농아인이 비장애인과 대화를 하려면 농통역사와 수화통역사 두 사람이 필요한데 특히 농통역사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농아인 몇 분이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말 못하고 글도 모르니까 일만 실컷 부려먹고 돈도 안 주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때리기도 하고 그럽니다. 말을 못하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겠거니 하는 거죠. 얼마 전에는 한 농아인이 열심히 일해서 한 달치 월급 60만 원을 주고 오토바이를 샀어요. 그런데 오토바이가게 주인이 농아인인 걸 알고 그걸 다시 훔쳐 갔답니다. 말을 못하니 경찰서에 가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가슴만 치다가 저를 찾아 온 거예요. 이런 일이 너무 많아요. 아무리 답답해도 말을 못하니 아마 답답한 일이 많은 장애인은 바로 농아인일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말이라도 시원하게 하잖아요."
한휘씨는 장애인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장애인들이 사기를 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이 적지 않아 하루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날이 없다. 워낙 일이 많아 3교대를 해서라도 센터를 24시간 열어놓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10개월부터 울지 않았던, 의젓한 우리 딸
▲ 엄마의 따뜻한 미소와 아빠의 자상함을 모두 닮은 한민지양.
부모가 24시간 붙어있어도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게 바쁘게 일하면서 민지양을 똑부러지게 키울 수 있었을까. 특별한 육아법이나 교육철학을 묻자 부부는 고개를 젓는다.
"특별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민지가 스스로 잘 커 준 거예요. 다만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하게 자유를 주었을 뿐입니다. 그저 민지가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부모와 자식간에 믿으면 그만이지요."
아기는 부모의 언어를 듣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말을 배우는데 부모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란 민지는 어떻게 말을 배울 수 있었을까.
"남들은 태교 음악도 듣고 그런다지만 전 들리지 않으니 음악은 듣지 못했고 그저 책이나 읽는 정도였어요. 10개월쯤 됐을 때 민지는 울지 않는 아기였어요. 울어도 엄마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았나 봐요. 그때부터는 울지 않고 기어와서 엄마를 툭툭 치더라고요.
제가 소리를 듣지 못하니 육아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정 부모님이 함께 살면서 민지를 돌봐 주셨지요. 원래 부산에서 살았는데 친정 식구들이 있는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할머니와 친척들이 곁에 있었으니 민지도 말을 배울 수 있었지요."
매일 30분씩 대화하기, 우리 가족의 행복
많은 농아인의 자녀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 민지는 부모의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야무진 딸이었다. 전화가 오면 받고 시장이고 동사무소고 말을 해야 하는 장소에서는 부모의 입이 되었다.
"민지는 두세 살 때부터 우리와 수화를 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엄마아빠가 듣지 못하는 걸 아니 소리 없이 손으로만 대화하는 거죠. 사춘기 때 걱정도 많이 했었죠. 혹시나 부모가 장애인이라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다행히 잘 지낸 것 같아요. 민지한테 고마울 뿐이지요. 우리 민지는 부모 때문에 일찍 철이 든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지금도 민지와의 대화가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아무리 늦게 들어가고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민지와 30분씩 꼭 대화를 합니다. 고3이라 늦게 들어오지만 엄마가 졸려서 자면 아빠라도 기다려 30분 정도 그날 일들을 이야기하죠. 민지는 학교 이야기, 우리는 센터에서 일어난 이야기…. 그 시간이 우리 가족들에게는 가장 행복합니다."
농아인을 돕는 부모님 때문인지 민지의 꿈은 억울하고 답답한 농아인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인권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딸의 결정을 만류하지는 않았냐고 하니 물론 딸이 편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 좋겠지만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딸을 믿고 그 결정을 믿기에 오히려 그런 딸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부모님과 소외된 농아인 위해 인권변호사 될래요
기자의 계속되는 추궁(?)에도 엄성연, 한휘 부부는 특별한 교육법이 없다는 대답만 내왔다. 하긴 부모 스스로 실천적인 봉사와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교육이 어디 있을까.
엄성연씨는 무보수 명예직 소장으로, 한휘씨도 생활비로도 어림없는 연봉 천백만 원의 이사장이지만 이들 부부는 이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서 양봉을 해 꿀을 팔아 생활을 하고 조금씩 저축도 해서 다른 농아인들보다는 넉넉하니 얼마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무나 행정 처리에 드는 시간이 너무 많아 농아인을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어 아쉽다고.
"부모님이 좋은 일을 하시는 걸 잘 알고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아주 좋은 부모님이세요. 약간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시지만 저와의 대화 중에 서로의 주장이 맞지 않는 경우 거의 저를 믿어주시거든요. 그건 다른 친구들 부모님과 다른 면이고요. 부모님이 자식을 믿어주는 것, 그게 오늘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인권변호사가 되서 부모님과 함께 소외된 농아인들을 위해 일할 거예요."
자신의 처지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부모와 그런 부모의 뜻을 이어 같은 길을 걸어가겠다는 딸. 민지 부모님에게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니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장애는 세상을 향해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김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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