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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정민
작성일
200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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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의 따뜻한 민박집
로마의 따뜻한 민박집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어려서부터 가고 싶어하던 외국은 거의 여행을 가 보았다. 캥거루와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는 것만 알던 호주도 대학생의 필수 코스인 양, 자리잡은 유럽도 이웃 나라 일본과 홍콩도 기회가 닿아서 다녀오게 되었다. 하지만 여행을 갔다 온 지금 가만히 그 때 일을 생각해보면 에펠탑, 콜로세움 등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추억이 오히려 생생하게 남아있다.
할머니도 여행지에서의 따뜻한 기억을 함께 나눈 분들 중 한 분이다. 할머니는 내가 묵었던 로마 민박집을 꾸리시는 분이었다. 가족이 함께 이탈리아로 나와 있지만 아들과 딸은 각자 공부하느라 바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운영하시면서 자식들 학비도 대시고 당신들 생활도 하시는 곳이었다. 어린 여행객들과 농담도 곧잘 하시면서 늘 여유 있어 보이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필요 외엔 평소 말씀도 아끼시고 약간 엄격해 보이는 할머니의 인상 때문에 나 역시도 할머니를 어렵게 생각하고 최대한 마주칠 기회를 줄이려 했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다른 나라들을 돌고 와서 이미 지친 나는 8월의 쪄죽을 듯한 더위와 싸우며 여행을 다닐 기운은 없었고, 자연히 민박집에 있다보니 자꾸 할머니 눈에 띄게 됐다. 몇 일 후 외국까지 나와서 방에 퍼질러 있는 내가 안돼 보이셨는지 할머니는 당신이 다니시는 곳에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스런 구경을 시켜주셨고 그렇게 다니면서 할머니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가 먹을 것에 신경을 집중했던 내 유치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셨다.
"왜 우리 민박집은 맨 날 고기반찬에 고기 국이 나와요? 다른 집들은 그냥 다 적당히 주는 편이던데... 그렇게 하셔서 장사가 되요?" "니가 뭘 모른다. 고기 비싼 거야 당연하지만, 따지고 보면 늬들도 집에서는 귀한 자식인데 더운데 이 멀리까지 왔으면 잘 차려먹어야제. 그리고 생각해보면 늬들 덕분에 우리 자식들 비싼 외국 공부 가르치는데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지, 늬들 푸성귀 반찬 먹여서 몇 푼 아껴봤자 그거 어디다 쓰겠노? 내 제일 한심한 거는 외국 나오면 한국인끼리 제일 조심하라는 얘기다. 먼 나라까지 왔으면 동포끼리 돕고 살아야지, 서로 등쳐먹을라고 애를 쓴단 말이가. 니도 어디가면 우리 나라 사람부터 꼭 챙기고 캐라. 같은 핏줄이 얼매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렇게 여행객들을 아껴주시고 먼저 챙기시는 분이었지만, 질서나 예절을 안 지키는 사람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한 분이셨다. 여자 여행객 중 영국 유학 중에 잠시 로마에 놀러온 언니가 있었다. 유학생이라 그런지 재미있고 개방적인 것까지는 좋은데, 한국에서만 자란 우리가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특히 숙소에만 돌아오면 짧고 속이 훤히 비치는 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건 젊은 우리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남자 여행객들은 언니가 식탁에 앉으면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몰라 식탁만 보고 밥을 먹고 잽싸게 도망치곤 했다. 워낙 성격도 대단해서 감히 누구도 말을 못 하고 있을 즈음 할머니의 꾸중이 내려졌다. 그 따위로 벗고 다닐거면 숙박비 안 받을테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는 서릿발같은 명령에 언니는 기세가 수그러들었고 다행히 우리들은 덜 민망할 수 있었다. 또 연락도 없이 밤중에 늦게 다니거나 안 들어오는 사람 역시 할머님의 철퇴 대상 1호들이었다.
한 번은 미대생들이 여럿 놀러왔었는데 나와 동갑인 여학생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뭘 잘못 먹은 게 크게 탈이 나서 거의 실려 들어오다 시피 해 몇일을 아무 것도 못 먹고 누워있었다. 처음 그 친구가 우리 방에서 맨 날 누워 있을 때는 어디서 나 같은 게으른 사람 하나 또 들어왔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배탈이 크게 나서 물도 제대로 못 먹고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 여학생에게도 할머니의 특별 대접이 시작됐다. 아침저녁으로 매끼니 죽을 쒀서 먹이시고, 어디서 약을 구해서 때맞춰 먹이시고, 가끔은 말동무도 해 주시면서 그 일행들보다 더 정성을 쏟으셨다. 정성 덕분인지 1주일 정도 지나서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정도가 되자 장기 여행객인 다른 오빠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곧 다른 나라로 이동해야 하는데 로마에 와서 누워만 있었던 것도 안 됐으니 같이 다니면서 로마 구경 좀 시켜주라는 덕분에 그 학생은 하루동안 최단기 코스로 로마 시내 주요 명승지는 다 둘러보고 웃으면서 떠났었다.
아마 그 친구도 나처럼 유럽 여행을 회상하면 할머니를 제일 먼저 떠올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를 떠나던 날, 나는 그간 모아놨던 밀린 방값을 다 지불하고, 가볍게 인사를 드렸다. 한번 보시더니 그럼 로마 돈은 다 쓴 거냐는 질문에 별 생각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말없이 얼마를 내 손에 쥐어주시며 "가는 길에 커피나 사 마셔라." 하시고는 돌려드리겠다는 나를 끝까지 못 본 척 하고 볼일을 보러 가셨다. 5시에는 나가봐야 해서 슬슬 짐을 마당에 내놓고 있는데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밥을 먹고 가라고 야단이시다. "할머니 나가기 전에 학생 꼭 저녁먹이고 보내라고 했어, 안 그러면 내가 혼나." 결국 그 날 늦을 것을 각오하고 로마에서의 마지막 고기 반찬을 먹어야만 했다.
얼마 전 영국에서 한인 민박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분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행객들 수발을 드시느라 푹 쉬지도 못 했지만, 자식들 공부시키는 재미에 누구보다 행복해하셨던 할머니.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고 따뜻한 모습으로 그 곳에서 여행객들을 맞이하셨으면 좋겠다. ♬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한울타리 자원교사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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