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
백종현 |
작성일 |
2009-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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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전교생이 만화 그려요, 부채·우산·나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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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전교생이 만화 그려요, 부채·우산·나무에…
창녕=이인묵 기자redsox@chosun.com
입력 : 2009.10.17 03:13
창녕군 유어초등학교
학생 38명 미니학교 환경만화 공부 6달만에 애니메이션까지 '척척'전국대회서 깜짝 수상
15일 낮 12시, 경남 창녕군 유어면 유어초등학교 시청각교육실. 강사 이혜경(26)씨가 교실 가운데 놓인 책상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밤톨만한 털 뭉치 여러 개를 올려놨다. 4학년 꼬마 10명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이씨를 바라봤다. 이씨가 "오늘은 털 뭉치로 움직이는 애벌레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전 애벌레가 경주하는 모양을 만들래요." "전 애벌레끼리 싸우는 거 할래요." "처음엔 애벌레였다가 하트 모양으로 바뀌는 걸 해볼래요."
아이들은 책상 위에 A4용지 4장 크기의 검은 종이를 깔았다. 그 위에 털 뭉치를 올려놓고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했다. 털 뭉치를 약간 움직인 뒤 또 촬영했다. 같은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한 뒤, 벽에 걸린 모니터로 잇달아 틀자 털 뭉치가 꿈틀대는 듯한 동영상이 나왔다. 정지된 장면을 이어붙여 동영상을 만드는 이른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stop-motion animation)'이다.
이날 유어초등학교 아이들은 애벌레 5마리가 화면 가운데서 뭉쳤다가 하트 모양, 별 모양으로 차례로 바뀌는 4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30분 걸려서 완성했다.
유어초등학교는 전교생 38명의 미니 학교다. 전교생이 모두 만화를 그리고 간단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줄 안다는 게 자랑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전문 강사 이씨를 파견해 지난 3월부터 매주 이틀씩 관련 수업을 해온 덕분이다.
부산 해운대에 사는 이씨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오전 5시30분쯤 집을 나와 지하철·시외버스·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오전 8시40분쯤 유어초등학교에 도착한다. "도시 애들은 본 게 많아서 흉내는 잘 내지만 창의적이지는 않은데, 여기는 작은 시골학교라 아이들이 좀 더 창의적일 거라고 기대했어요. 오면서 신났죠. 그런데 기대와 현실이 좀 달랐어요."
이씨는 아이들에게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너나없이 백지 한 모퉁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밑에 '큰 대(大)'자를 그렸다. "물속 세상을 그려보라"고 하자 다들 심드렁하게 '8'자 모양 물고기 몇 마리와 '∼' 모양 미역 몇 줄기를 그려넣었다. 이씨가 4컷 만화가 인쇄된 종이를 나눠주고 비어 있는 말풍선을 채우게 했다.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어지게 적어넣은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이씨는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했다.
유어면은 인구 2000명 남짓한 한촌(閑村)이다. 인구 열 명 중 여덟 명이 논밭을 일구며 산다. 인구 절반(47%)이 60세 이상이다. 유어초등학교 학생 중 상당수가 도시에 돈 벌러 간 부모 대신 조부모와 살거나, 부모의 이혼·별거로 한쪽 부모와 사는 아이들이다.
이씨는 "어떻게 해야 아이들 속에 깃든 창의성을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계기는 4월에 왔다. 이씨가 아이들에게 "멸종위기종인 먹황새를 그려보라"며 관련사진을 교실에 붙였다.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래요. 만날 보는 새가 무슨 멸종 위기에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불과 4㎞ 떨어진 우포늪에서 큰기러기, 저어새, 고니 같은 희귀조류를 매일같이 보고 있었다. 이씨가 무릎을 쳤다. 도시 아이들 가르치듯 접근하는 대신, 아이들이 잘 아는 분야인 '자연'을 소재로 수업하자고 착안한 것이다.
소재가 바뀌자 아이들이 활기를 띠었다. 이현호(11)군은 장수풍뎅이를 주인공 삼아 만화로 일기를 그렸고, 원주아(11)양은 우포늪에 생태관광 온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것을 꼬집는 만화를 그렸다. 꼭 종이를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은 우산, 신발주머니 위에 신나게 만화를 그렸다.
이씨는 지난 5월 환경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하고 '사랑의일기재단'이 주최하는 '2009 사랑의 일기 큰잔치'에 신청서를 냈다. 3학년 이상 학생 31명이 모두 참가하기로 했다. 여름방학 중에도 매일 10명쯤 돌아가며 학교에 나와 자신들의 일상과 우포늪의 자연을 소재로 만화를 그렸다. 석 달간 아이들이 완성한 만화 일기는 총 100여점이다. 나무판·바람개비·우산·헝겊주머니 등 온갖 재료를 활용했다.
8월 말 열린 시상식에서 유어초는 단체 최우수상을 받았다. 31명 전원이 개인상도 받았다. 8월 22일, 성무영(62) 당시 교장이 서울에 올라가서 상장을 받아왔다. 개학날 현 교장인 성낙진(60) 교장이 아이들을 한 명씩 호명해 상장을 건넸다. 그때마다 시골학교가 박수 소리로 떠들썩했다.
6학년 담임 하치권(35) 교사는 "애들이 예전엔 장래희망을 물어도 심드렁했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6학년 정병찬(12)군은 "우리 같은 시골 애들이 서울 애들을 제치고 상을 탈 줄은 몰랐다"고 자랑했다. 방희련(12)군은 "어떻게 하면 애니메이터가 될지 매일 생각한다"고 했다.
5학년 이규석(11)군의 어머니 허행자(39)씨는 "우리 애가 '미술 배우고 싶다'고 조른다"며 "부모도 전혀 몰랐던 재능과 흥미를 일깨워준 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성낙진 교장은 "내년에도 진흥원 도움을 받아 만화 일기 수업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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