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밑에서 니 친엄마가 찾더라"
청계천 영도교엔 내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김혜원(happy4) 기자
청계천과 멀지 않은 종로구 숭인동에서 태어난 저는 청계천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습니다. 대여섯 살 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입니다. 막 군에서 제대한 막내삼촌이 저를 부르더니 아주 심각한 얼굴로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디알처럼 새까만 눈을 깜빡거리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은 저에게 삼촌은 진지하게 제 출생의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삼촌과 고모가 알려준 '출생의 비밀'
▲ 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영도교(영미다리)
ⓒ2005 김혜원
"혜원아. 비밀이야기 하나 해줄게. 이거 정말 비밀인데. 너 영미다리 아래에서 주워왔거든. 친엄마 찾으려면 거기 가봐. 다리 밑에 땟국물 줄줄 흐르는 아줌마 있을거야. 그 아줌마가 니 엄마야. 얼마전에 거기서 봤는데 니네 엄마가 너 찾더라."
삼촌의 말에 충격을 받은 저는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친엄마를 찾아 식구들 몰래 청계천에 있다는 영미다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간 청계천에 친엄마는 커녕 영미다리라는 이름조차 있을 리가 없었지요. 모두가 삼촌의 장난이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그날 저는 아무 말없이 집을 나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종아리만 맞을 판이었습니다.
쥐콩만한 계집아이가 늦은 밤까지 뭐하고 싸돌아다니다 왔다며 다그쳐 묻는 엄마에게 뭐라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삼촌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듯 한마디 합니다.
"형수, 혜원이 친엄마 찾으러 영미다리 갔다 왔데요."
"뭐라구요? 영미다리요?"
"예, 혜원이 거기서 주워왔잖아요. 지네 친엄마가 찾는다고 했더니…."
"아이구 삼촌, 애한테 장난이나 하고 정말…."
"하하하, 안 믿는 척하더니 진짜 찾아 갈 줄은 몰랐죠."
"아이고 내가 미쳐. 이눔의 지지배. 똑똑한 척 혼자 다하는 년이 삼촌말에 속아서…. 호호호. 그래 엄만 찾았니? 호호호. 손씻고 와 밥 줄게."
그 날 식구들은 저 때문에 대청마루를 구르며 웃고 또 웃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아빠가 막내 삼촌 어릴 적에 써 먹었던 장난이었답니다. 막내삼촌이 저에게 그대로 복수를 한 것이죠. 그 장난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내 뒤에 태어난 동생들 셋 모두 영미다리에서 주워왔다는 '출생의 비밀' 때문에 한번씩은 울고 넘어가는 장난을 통과의례처럼 치러야 했답니다. 물론 그때마다 이미 당했던 식구들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속이는 재미를 만끽했지요.
저를 포함한 우리집 사남매를 모두 주워왔다던 영미다리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복개되어 제 어린시절에는 이미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가 되어 있었으니 말이죠. 그런 영미다리가 이번 청계천 복원으로 다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함께 우리 어린시절 그리고 부모님의 어린시절 추억이 배어 있을 영미다리를 찾아 보았습니다.
▲ 청계천 영도교(영미다리)위에서 추억에 잠긴 아버지
ⓒ2005 김혜원
"청계천 물이 핏빛이었지...", 아버지의 추억
"영도교? 영미다리는 어디가고 영도교가 있네."
엄마는 다리에 새겨진 표시를 보고 영미다리가 아니란 것에 놀라는 눈치십니다.
"그러게 여기가 원래 영미다리였는데…. 어릴 때 내가 여기서 살다시피 했는데 이상하네. 영미다리가 맞는데?"
아버지 역시 수십 년 전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시다며 다리 이름이 바뀐 것에 궁금증을 표하십니다. 저 역시 영미다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수 없어 안내소를 찾았습니다.
"여기가 원래 영미다리라고 하던데 지금은 영도교로 표시되어 있네요. 어떻게 된 거죠?"
"그건요. 원래 조선시대에는 영도교라고 불렀는데 이후에 민가에서 영미다리로 바꾸어 불렀던 거라고 합니다. 영미다리가 원래는 영도교였던 거지요."
▲ 아버지가 자주 건너 다니셨다는 영도교(영미다리). 건너편으로 황학동시장이 보인다
ⓒ2005 김혜원
일흔둘이신 아버지도 그 사실은 모르셨던지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아버지의 어린시절 청계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일곱 여덟살 때였던 것 같다. 무슨 일이었는지 엄마한테 혼이 나고 비실비실 남의 집 추녀 밑에서 빗방울 피해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깜박 잠이 들어 버렸던 모양이야. 어머니가 나를 찾아 온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다니시며 목이 쉬도록 찾게 한 죄로 호되게 회초리를 맞았지. 그러면 매를 피해 영미다리 밑 개울(청개천)가로 가는 거야. 거기서 혼자 미꾸리도 잡고 버들치도 잡으며 놀다보면 어느새 옷은 개울물에 푹 젖고 청계천 썩은 물 냄새가 코를 찌를 지경이 되지. 그렇게 한참을 놀다 몰래 집에 들어와 마루 끝에서 졸다가 잠이 들어 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잠든 나를 힘겹게 끌어다 옷을 벗기고 씻겨 주시던 어머니의 다정스럽던 손길이 그립구나."
▲ 이 물에서 어릴적에 미꾸라지도 잡고 버들치도 잡았는데....
ⓒ2005 김혜원
청계천에 나오신 아버지는 대여섯 유년시절의 당신 모습과 함께 돌아가신 할머니의 기억이 떠오르셨는지 잠시 눈자위를 붉히시더니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청계천은 여러가지 추억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6·25 동란때는 뚝방에 시체들이 즐비했지. 죽어 자빠진 인민군 시체와 국군의 시체, 쓰러져 썩어가는 말들의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를 듯했다. 그 때는 청계천 개울물도 검붉은 핏물로 흘렀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시체 썩는 냄새와 핏물이 흘러넘치던 청계천을 잊을 수가 없어."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아침 일찍 청계천에 나가면 맑은 물이 흘렀다. 그 때는 아이들이 홍역에 걸리면 첫새벽에 영미다리 아래 물을 떠다가 보리차를 끓여 먹이라고 했지. 감쪽같이 낫는다는 거야. 왜 그랬는지 무슨 약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했어. 약이 귀한 때니 뭐는 약에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사는 아름다운 청계천이 되길
▲ 예전에는 없었다는 징검다리. 노인들이 건너기엔 돌 사이 간격이 너무 넓다.
ⓒ2005 김혜원
아버지는 오랜만에 열린 청계천 영도교(영미다리)에서 당신의 어린시절 추억을 더듬으시며 감회에 잠기셨습니다. 다리 아래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시며 먼 곳을 응시하시는 아버지. 다리 아래를 말없이 응시하고 계시는 아버지는 아마도 어린시절 청계천에 깨벗고 목욕하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많이도 살았다. 이제 보니 나도 많이 늙었어. 저 다리 아래서 물고기 잡고 놀던 그때. 그때가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구나. 검정다리 살코지다리…. 못살던 때라 다리아래 거지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그때 같이 멱 감고 천렵하던 코 흘리게 동무들도 이젠 다 저 세상사람이 되고…. 이 좋은 구경하지 못하고 먼저 간 친구들도 그립구나."
아버지의 유년시절 추억과 제 어린 시절의 웃지 못할 일화가 숨쉬고 있는 청계천. 이제 새 물이 흘러 새로운 사람들의 추억이 될 청계천에서 저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추억의 청계천 이야기를 나누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한 청계천. 많은 시민들의 바람대로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사는 아름다운 하천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2005-10-0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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