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 옛날엔 동네잔치였는데···”
1학년 어린이들이 힘을 모아 ‘영차영차’ 공굴리기를 하고 있다.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전력질주하고 있다.
꼭두각시 춤. 짝꿍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여자아이가 뾰로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
3학년 어린이들의 풍선 먼저 터트리기(좌)와 2학년 어린이들의 소고 무용(우).
5·6학년 여자아이들이 선보이는 부채춤(좌)과 박 터트리기(우)의 모습.
“수업을 안 해서 좋아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서 좋아요”
가을운동회에서 만난 아이들은 신이 났다. 들뜬 표정으로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을 활보한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줄을 맞춘다. 초조한 마음으로 공연순서를 기다리면서도 엄마와 할머니를 찾느라 정신없다.
29일 경기도 의정부시 회룡초등학교의 가을운동회는 떠들썩했다. 운동회 대신 학습발표회를 겸한 축제를 개최하는 학교도 많다지만 이 곳은 옛날 방식 그대로다.
1학년 아이들에게는 공굴리기도 만만치 않다. 반환점을 코앞에 두고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 “공이 너무 커서 마음대로 안 굴러가죠. 서두르지 말고 친구들과 손발을 맞춰보세요”라는 선생님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달리기 경기에서도 결과는 마음 같지 않다. 출발을 알리는 ‘땅’ 소리에 있는 힘껏 달려보지만 1등부터 3등까지만 찍어주는 팔뚝도장을 받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1등이든 꼴찌든 상품은 똑같이 공책1권.
딸아이가 꼴찌를 했다는 한 학부모는 “나는 줄곧 1등만 했는데 얘는 누굴 닮아 그런지 모르겠다”며 “내가 좀 가르쳐줄 걸 그랬다”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꼭두각시 춤, 소고춤, 곤봉체조, 부채춤 등 학년별 무용을 선보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용 대열 안까지 들어와 “어머~ 잘 한다”고 격려하는 어머니와 “00야 여기 좀 봐”라며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아버지까지. 행여 동작 하나라도 잊어버릴까 진지한 아이들에 반해 더 아이 같은 모습이다.
운동회의 백미는 역시 이어달리기. 응원도 극에 달한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에서부터 “청군 승리, 짝짝 짝짝짝”까지 그 형식도 다양하다. 바통을 놓치거나 넘어지면 응원석에 앉아있는 아이들도 제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괜찮아, 괜찮아”를 목청껏 외친다. 주자인 아들을 따라 트랙을 함께 도는 어머니부터 얼떨결에 백군을 응원했다는 어머니까지 이어달리기로 모두가 한바탕 시끄럽게 어울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효도경기로 마련된 ‘월척이요’에서 소주를 ‘낚아 올린’ 김영순(72) 할머니는 “마실 줄은 모르지만 기분 아니냐”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오자미(모래주머니)를 던져 터트린 박 속에서 ‘야~ 점심시간이다’는 글귀가 펼쳐지자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난간 옆이라도 좋다. 흙먼지가 불어도 좋다. 아이들은 김밥이며 치킨을 양 손에 쥐고 먹느라 바빴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지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때맞춰 교문에는 조그만 장이 섰다. 풍선과 솜사탕부터 장난감 총과 화약총까지. 500원짜리 목걸이와 300원짜리 커플반지도 눈에 띄었다. 구름 떼처럼 몰려든 아이들 덕분에 장사꾼들도 신이 난다.
“옛날엔 가을운동회가 동네잔치였어. 운동회한다고 하면 식당에서는 전날 운동장에 솥단지를 걸어두고 기다렸을 정도야. 부모들도 죄다 나서서 뛰고 구르고 했지. 그런데 요즘은…”
30여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운동회 사진을 찍었다는 김형표(72) 할아버지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분주했다. 운동회는 많이들 하지만 이날처럼 한복을 입고 꼭두각시·부채춤을 선보이는 학교는 없다는 것. 대부분 체육대회나 학습발표회로 대체하는 곳이 많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점차 사라지고 있는 가을운동회에 대한 찬반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 학부모는 “우리 어렸을 때처럼 참여율이 높은 것도 아닌데 운동회 연습하느라 꼬박 한달을 들여 아이들만 힘들게 한다”며 “가을운동회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6학년을 맡고 있다는 선생님도 “아이들을 위한 행사가 지역주민과 학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한 것 같다”며 “물풍선 터트리기처럼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 위주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어를 전담하고 있다는 한 선생님은 “운동회 대신 이벤트회사를 불러 아이들만 대상으로 게임을 하는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율동지도, 선물포장, 만국기 달기까지 운동회 준비과정이 힘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운동회를 통해 단체경험을 할 수 있다”며 “소고·부채춤 등을 배우면서 모두 한번씩은 참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2005년 9월 30일 (금) 14:44 경향신문
<미디어칸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
